協会からのお知らせ

(公財)古都大宰府保存協会から、催事や活動の様子などをお伝えします。

大宰府展示館

2024年 09月01日
다자이후 전시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大宰府展示館 ハングル案内)

다자이후 전시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大宰府展示館へようこそ

 다자이후 전시관은 다자이후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시설입니다.
 1300년 전, 다자이후는 규슈의 행정상 중심지에 위치했으며 정치와 종교, 문화의 일대 거점이었습니다. 다자이후는 일본과 외국을 연결하는 창구 역할을 담당했던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동서를 잇는 고대 교역로였던 실크로드의 동쪽 끝에 위치했던 일본은 다자이후를 통해 흘러가는 문화와 물자를 통해 당시 일본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국제성과 지적 교양, 학문에 대한 정신을 양성했습니다.

 다자이후 전시관은 다자이후의 다채로운 역사에 대해 소개합니다. 방위를 목적으로 다자이후 지역의 자연 지형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궁전과 같은 정부기관의 정밀한 입체 모형에는 중국 특유의 영향이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사람들이 입던 옷의 색상이 어째서 그들의 신분과 직업에 관련되어 있었는지, 당시의 다자이후에서 어째서 그렇게 다양한 요리를 먹을 수 있었는지 등 다자이후 전시관을 관람하면 당시의 다양한 일들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사진 갤러리에서는 다자이후의 수많은 옛 영광들을 설명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발굴 조사에 주목합니다.

 다자이후는 2019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연호인 레이와(令和)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레이와라는 연호는 8세기에 다자이후에서 거행되었던 ‘매화 연회’에서 유래했습니다.
 다자이후 전시관에서 고대 다자이후로 떠나는 여행을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다자이후 디오라마: 자연 지형을 활용한 방위 大宰府 再現ジオラマ 自然防衛
 
 다자이후는 7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규슈의 실질적인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도시가 있는 장소는 지역의 지형적인 특성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곳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디오라마는 어떻게 주변의 산들과 풍경이 자연의 험난한 길을 형성하고, 침입자들로부터 제대로 방어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자이후는 아시아 대륙과 가깝다는 지리적인 특징에 따라 외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 도시는 하카타만에 입항한 외국 사절단이 가장 먼저 거쳐가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바다와 가까워 다자이후가 외국의 공격에 따른 영향을 받기 쉬운 상황이었습니다.

 7세기의 아시아 대륙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일본은 663년에 당나라에 패함에 따라 해외의 위협에 취약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조정은 664년에 미즈키(水城)라고 불리는 해자가 설치된 방어벽을 건설하도록 명했습니다. 미즈키는 동서로 산에 둘러싸여 평야가 가장 좁아지는 위치에 1.2km가 넘는 길이로 축조되었으며, 지금의 후쿠오카시가 자리한 해안 평야에서의 잠재적인 공격을 저지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추가적인 방어를 위해 시오지야마 산 정상의 오노성을 포함한 여러 요새가 지어졌습니다. 지금도 이들 방어 시설의 옛 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자이후의 도시 면적은 약 2km2로 정방위에 기반하여 격자 모양으로 건설되었습니다. 이는 고대 동아시아 도시의 특징입니다. 규슈 각지에서 이곳으로 모인 사람들과 고급 관리, 상인, 그리고 외국 사절단이 빈번하게 왕래했습니다.

 12세기 이후 도시의 모습은 변화했지만, 이곳은 14세기까지 정치의 중심지로서 크게 번영했습니다.


다자이후 정청의 모형 大宰府政庁の模型
 
 이 모형은 실크로드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중국 및 아시아 대륙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8세기에 다자이후 정청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중국 궁전의 일반적인 특징인 아름다운 건축물과 좌우 대칭 등 중국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계는 오행사상(만물은 목, 화, 토, 금, 수 5개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상)과 풍수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중심이 되는 정전(正殿)은 태양의 기운을 받고자 남향으로 건설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오지야마 산의 기슭에 위치하여 자연 지형을 통한 방위 기능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건물 지붕에는 악귀를 퇴치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요괴의 얼굴을 장식한 귀와(鬼瓦)가 사용되었습니다. 전시된 귀와는 다자이후에서 발굴된 것으로 벌린 입과 튀어나온 눈은 분노에 가득 찬 요괴의 표정을 한층 더 강조합니다. 건물 내부에는 꽃과 식물 무늬로 장식된 사각형 또는 삼각형의 타일이 바닥과 계단에 사용되었습니다.
 전시관과 가까운 곳에 과거 정청 시설이 있었던 장소가 있습니다. 현재는 초석만 남아 있으나, 그 옛날 크게 번영했던 국제도시 다자이후와 걸맞은 드넓고 위풍당당한 모습의 시설이었습니다.




다자이후에서의 색상과 위계 大宰府の色と位階
 
 색상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차지했던 고대 일본에서 관리들은 위계에 따라 정해진 색상의 의복을 착용했습니다. 소치(장관)는 전시된 인형과 같은 색상의 옅은 보라색의 의복을 입었습니다. 다른 관리들도 신분적 지위에 따라 특정 색상의 의복을 착용했습니다. 고대 다자이후에서 위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으며, 관리 제도에서 특정 일에 대한 취임 자격을 규정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일본 국내의 신사에서는 이러한 위계 제도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으며, 가까운 다자이후 덴만구 및 가마도 신사에서도 신관은 지위에 따른 특정 색상의 의복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허리띠에도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전시 케이스의 왼쪽에 있는 허리띠 장식은 지위가 낮은 관리가 착용했던 평범한 허리띠와는 대조적인 형태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허리띠는 의복 안에 착용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볼 수 없었습니다.
 평평한 모양의 나무 판자는 목간(木簡)입니다. 목간은 과세품에 관한 정보를 기록하는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수정이 필요한 경우나 재사용할 경우에는 글자가 적힌 판의 표면을 날카로운 칼로 얇게 깎아내 판자를 다시 쓸 수 있도록 했습니다. 목간은 친환경적이면서도 종이가 값비싸고 공급량이 적은 물품이었던 당시에는 널리 사용된 도구였습니다.
 정중앙에 전시된 물품은 벼루와 송연으로 만들어진 먹의 복원품입니다. 송연은 아교와 함께 반죽하여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주형(舟形)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일본 각지에서 모은 와카(일본 전통 정형시)를 수록하고 8세기에 완성된,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와카집 ‘만엽집(萬葉集)’에는 다자이후에서 읊은 시도 포함되어 있는데, 당시 문장가는 만엽집에서 볼 수 있는 와카의 일부를 기록하고자 이 같은 문방구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8세기 다자이후의 디오라마 8世紀の大宰府のジオラマ
 
 이 입체 모형은 작은 규모에도 번영을 이루었던 다자이후의 도시가 8세기에는 어떤 모습으로 설계되었는지를 묘사합니다. 다자이후는 천황 아래 넓은 지역을 다스리는 중요한 관공서였으며, 도시는 매우 중요한 정치 행정 및 외교, 교역의 중심지이자 군사 거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자이후는 정치에만 관련된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문화와 종교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입체 모형의 오른쪽 끝에는 당시 규슈의 주요 불교 사원이자 거대한 복합 시설이었던 간제온지 사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내에는 과거 위용을 자랑하던 오층탑이 세워져 있지만, 자연재해로 인해 다른 수많은 건물과 함께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재건된 일부 건물만이 남아 있습니다.
 간제온지 사원과 인접했던 학교에서는 규슈 북부에서 모여든 남성들을 교육했으며, 학생들은 이후 규슈에 머물면서 고관이 되었습니다.
 다자이후 정청은 시오지야마 산 기슭에 위치하며 산으로 이루어진 자연 방어와 방어용 벽과 해자로 조성된 미즈키를 통해 보호받고 있었습니다. 다자이후 정청은 주홍빛으로 칠한 건물들로 구성된 궁전 시설이었으며, 당시 도읍이었던 헤이조쿄(지금의 나라현에 위치)에 있었던 궁정과 궁전을 모델로 삼아 지어졌습니다. 이 입체 모형을 통해 8세기 다자이후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발굴 조사는 고대 도시의 규모와 역사를 추가적으로 밝혀내고 있습니다.


고대 다자이후를 발굴 古代大宰府を再訪


 다자이후는 과거 행정과 외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심지였습니다. 이 지역은 아시아 대륙과의 문화적인 교류가 활발했으며 새로운 사상 및 문화 발전의 거점이었습니다. 그러나 12세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지배권이 무사와 다이묘(영주)들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다자이후의 영향력은 약해졌습니다. 지난 50년간 발굴 조사를 통해 고대 다자이후의 규모가 밝혀졌으며, 고고학의 발굴 장소 및 항공 사진을 보면 다자이후의 과거 설계 및 구성을 더욱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발굴 조사 후에는 유구를 보호하고자 땅을 메우고 풀로 덮은 후, 아래에 유구가 있다는 것을 표시합니다. 이처럼 발굴 조사 후에 실시되는 과정에는 자연 경관 보전과 이 곳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다는 두 가지 역할이 있습니다. 유구 중 일부는 이 배수 도랑처럼 의도적인 형태로 남겨둡니다. 이 도랑은 8세기 초기의 것으로 생각되며, 도랑이 있었던 본래의 장소에 전시관을 세워 보존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중앙의 커다란 바위는 건물의 기둥을 지지했던 초석입니다. 이 바위는 현재의 상태로 출토된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발견한 것을 옮겨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 박물관은 지역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자이후의 다채로운 유산과 일본의 역사 속 다자이후의 역할에 관한 정보를 보존하고 널리 알리는 활동에 도움을 주는 자원봉사 프로젝트에는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매화 연회 梅花と詩
 이 입체 모형은 730년에 다자이후의 소치(장관)였던 오토모 다비토(자주색 의복을 착용)의 공관에서 열린 ‘매화 연회’를 재현했습니다. 관리들은 중국에서 가져와 당시에는 보기 드물었던 매화나무 아래에서 함께 먹고 마시며 서로 즉흥 와카(일본 전통 정형시)를 읊었습니다.
 7세기부터 12세기는 다자이후의 역사 중에서도 황금기에 해당합니다. 이 시기, 다자이후의 관리들은 지리적으로 아시아 대륙과 가깝고 여러 왕조들과 빈번하게 교류했던 경험을 통해 외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었습니다. 이들은 외교나 무예에 능숙했으며 뛰어난 와카 시인으로서도 기대받는 존재였습니다. 매화 연회의 참가자는 자신들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매화꽃의 개화, 날씨, 연회의 분위기를 주제 삼아 즉흥적으로 와카를 읊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곁에서 기록자는 참가자가 읊은 와카를 기록했습니다.
 이 입체 모형에 사용된 하카타 인형은 후쿠오카의 독창적이고 뛰어난 전통 공예품입니다. 가까이서 살펴보면 술잔 속과 참가자의 머리에 매화 꽃이 보입니다. 관리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나타내는 다른 색상의 의복을 입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연회는 일본 문화에 있어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연회에서 읊었던 32수의 와카는 만엽집(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일본 와카집, 8세기 성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연호인 레이와(2019-)는 지금의 일본 정부와 역사가가 만엽집에 수록된 와카의 서문에 있는 한자에서 착안하여 지어졌습니다.



다자이후의 식문화 大宰府の食文化
 목간(木簡)을 통해 8세기 다자이후의 식문화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다자이후와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나라에서 발굴된 목간에 적혀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당시에 무엇을 먹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 전시된 요리와 유사한 것들이 730년 정월 초하루에 열린 ‘매화 연회’에서 제공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관들에게는 다양한 식재료를 사용한 호화스러운 식사가 제공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내빈에게 제공된 음식으로는 꿩과 연어를 말린 음식과 은어 초밥, 전복술찜, 다양한 야채절임, 도미나 오징어 및 기타 회를 비롯해 찹쌀과 쑥의 잎을 빻아 만든 봄철 전통 과자인 쑥떡 등이 있었습니다. 이 같은 음식들은 오늘날에도 일본의 음식점(일본 요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연회의 입체 모형에서는 여러 명의 참가자가 술잔을 치켜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만개한 벚꽃을 즐기는 꽃구경 놀이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술은 연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당시 와카를 짓는 참가자들이 창의성을 발휘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레이와-새로운 시대의 시작 「令和」-時代の始まり
 일본에서는 천황이 즉위할 때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합니다. 레이와 시대는 2019년 5월에 시작되었으며, 이름은 이 입체 모형에서 묘사되는 유명한 ‘매화 연회’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연회에서 읊었던 32수의 와카(일본 전통 정형시)는 자세한 내용을 만엽집(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일본 고전 와카집)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연호명의 두 한자 ‘레이(令, 하여금 령/영)’와 ‘와(和, 화할 화)’는 만엽집의 서문에서 따왔습니다. 두 번째 글자인 ‘와(和)’의 의미는 명확한데, ‘고요함’ 또는 ‘조화’를 의미합니다. 첫 번째 글자인 ‘레이(令)’는 현대 일본어에서는 일반적으로 ‘지휘’ 또는 ‘명령’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답다’ 또는 ‘좋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한자를 따온 만엽집의 서문에서는 ‘아름답다’라는 의미와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와카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초춘영월, 기숙풍화(初春令月, 氣淑風和)
 (초봄의 영(令)월, 공기는 맑고 바람은 평온하다.)

 이 구절은 분명 매화꽃의 개화뿐 아니라 서문의 작가가 바라본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담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들 와카가 다양한 외국 문화를 받아들였던 다자이후에서 지어졌다는 사실도 의미가 깊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레이와의 글자에는 낙관적인 사조(思潮)와 견고한 국제 관계, 국제화, 그리고 외국 문화에 대한 경의를 내포하고 있는 일본 사회와 앞으로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この英語解説文は観光庁の地域観光資源の多言語解説整備支援事業で作成しました。
This English-language text was created by the Japan Tourism Agency.
2024年 09月01日
欢迎光临大宰府展示馆(大宰府展示館 簡体案内)

欢迎光临大宰府展示馆 大宰府展示館へようこそ

 太宰府在12以前被称“大宰府”,大宰府展示致力于向来访传递大宰府的古老故事。
 1300年前,大宰府是九州的行政中枢,同也是一大政治、宗教和文化中心,更是日本通向世界之门。由于日本位于古代西方的易路线丝绸之路端,大宰府的物文化培养了当在日本确属罕、高素养以及学精神。
 大宰府展示着重介太宰府的悠久史。里,可以学如何利用本地区的自然地形行防御,通过观赏殿般精美的官署立体模型感受其独特的中国元素­,了解人穿着的色与他社会等的关发现深受本地百姓喜的各种珍奇美食。除此之外,展一角的明板了持至今的掘工作期的考古研,揭示了昔日大宰府的种种旧貌。
 太宰府与2019年启用的日本新年号有着密切的令和二字源于公元8大宰府行的梅花宴,宴上所创诗集的序文中写道:初春令月,气淑
尽情享受古老的大宰府之旅吧!





大宰府立体景模型:自然防 大宰府 再現ジオラマ 自然防衛

 太宰府在12以前被称“大宰府”,公元712大宰府是九州政治和文化中心。大宰府的充分利用了本地的地形特点,从立体模型可以看出,周的山脉和地形巧妙地形成一个天然的瓶抵御入侵者提供了固的防线。 
 由于毗邻亚洲大大宰府成重要的外交枢,它是外国使团进入博多湾后的第一个停靠港。不因大宰府,它也容易受到外国的攻
 7洲大政治动荡663年兵于中国唐朝的日本外防能力相当薄弱。于是,朝廷于664年下令修建“水城”,道防御性城伴随着延超1.2公里的城河,可以阻来自今福市所在的沿海平原的潜在性攻一步城市,本地修建了要塞,位于四王寺山的大野城就是其中之一。些防御施的至今依然可
 当大宰府的面积约为2平方公里,正方形的城市呈棋式布局,属古代东亚城市格。来自九州各地的人,包括高官僚、商人,甚至外国使繁往来于此地。
 12世纪以后,城市景观慢慢发生了变化,但大宰府身为政治中心一直繁荣到了14世纪。


大宰府官署模型 大宰府政庁の模型

 这
是再8纪时大宰府官署的模型。12以前,太宰府被称“大宰府”,当时丝绸之路达,大宰府与中国和洲大关系密。从建筑的美感和称性等中国殿的特征中就可以看出,当的官署深受中国影响。

 这些建筑遵循中国水学和古代哲学理建造。正殿(行政大)坐北朝南,吸收阳气,行向上之运。而四王寺山山脚的地理位置则为提供了自然防御屏障。
 官署屋覆盖着“鬼瓦”,种瓦片类似中国古建筑的面瓦当,用以邪。展出的鬼瓦出土于大宰府,开的大嘴和凸出的眼睛的表情。大内的地面和楼梯使用了装有花草案的方形和三角形瓷
 官署址就在展外,虽然如今只剩下基石,但它曾经庞大而宏与太宰府繁荣的国大都市相得益彰




大宰府的色与等 大宰府の色と位階
 
 在古代日本,颜色具有强烈的象征意义。政府官员须根据他们的官阶穿着特定颜色的衣服。如展示中的仿真人物一样,地方最高长穿浅紫色官服,而其他官员也依照自己的身份地位穿着某种颜色。当时等级极其重要,和穿着指定颜色的权利一样,等级决定了在官僚机构中从事特定工作的资格。直到今天,我们仍然可以在日本的神社中看到这种等级制度的痕迹,比如在附近的太宰府天满宫和灶门神社,不同等级的神官就身穿不同颜色的衣服。
 腰也具有重要意。展柜左华丽与低佩戴的朴素腰形成比。过遗憾的是,些腰系在衣服里面,并不眼。
 这扁平的木片叫“木”,它用途多,比如可记录课物的信息。木也很,当不再需要上面的信息只要用利的小刀削去表面的文字就能重复利用。在那个纸张且稀缺的年代,种做法有价
 在展品的中央,可以看到一枚台和一墨条复制品,船形墨条是将松木烟灰和熬制的胶揉在一起制成。当文人墨客可能就是使用这样写工具来记录《万叶集》中的一些和歌(日本传统歌形式)。《万叶集》是一部具有重要文化价的和歌中和歌来自日本各地,其中也有一些是在大宰府(今太宰府,12以前的名称)





公元8大宰府立体模型 8世紀の大宰府のジオラマ
 
 公元8纪时大宰府(今太宰府,12以前的名称)十分繁荣,个立体景模型时紧凑的划布局。大宰府的字面意思达天皇命令的官衙,意味着它是重要的易枢事要塞和政府行政中枢。然而,大宰府并非只局限于政治,它在日本文化和宗教方面也发挥着重要作用。
 模型的最右端是世音寺,大的建筑群是九州首屈一指的佛寺。曾有一座雄的五佛塔,但后来与其他众多建筑一起于自然灾害。如今寺内只剩下一些重建的殿
 与寺庙毗的一所学校来自九州北部的男孩提供教育,学生们毕业都留在九州,成本地政府官
 大宰府官署位于四王寺山山脚下,它得益于山体的天然防御性,并被由防御城河成的“水城”保官署是一的朱殿式建筑群,以平城京(今奈良)的与殿宇为蓝。立体模型展示了8纪时大宰府的格局,但持至今掘工作,依然不断地在座古都的模和悠久方面们带新的发现

古代大宰府的 古代大宰府の発掘

 大宰府(今太宰府,12以前的名称)重的行政和外交中心,由于跟洲大的文化也十分密切,所以它新思想和文化展的交流中心。然而,随着12国家控制权落入武士和大名(大)手中,座城市的影响力逐式微。考古学家在50年的中,逐明确了古代大宰府的。挖掘的现场和航拍照片,更是将昔日大宰府的城市设计布局清晰地展示在人面前
 遗束后被填平并用草覆盖行保,同打上标记表明地下埋藏物。掘后的理方式既保了自然景,又彰了本地史。也有一些存特意不予复原裸露在外,例如条排水沟,其史可以追溯到公元8早期,大宰府展示就是围绕着它修建的。
 中央的大石是建筑物支柱的石,它并非出土于此,很可能是在附近发现后被移展示。
 展示本地社区密切合作,鼓励本地居民参与志愿者目,帮助保并宣太宰府丰富的遗产及其在日本史上所起到的重大作用。



梅花宴  梅花の宴

 这一处立体实景模型,展现了公元730年在大宰府(今太宰府,12世纪以前的名称)最高长官——伴旅人(665-731;身着紫衣者)将军官邸举行梅花宴。这些在当时十分珍稀的梅花树来自中国,政府官员们聚集在树下食馔饮酒,即兴赋诗。
 公元712大宰府史上的黄金代。由于大宰府毗邻亚洲大,与其他王国交往繁,大宰府的官员们对外国文化深度的理解力和极高的鉴赏力。他外交和事,精通诗词。参加梅花宴的人都能即兴吟歌作,并且取材广泛,从梅花、天气到宴会气氛,可万象。宴会上的官方记录员则将他们创作吟和歌(日本传统歌形式)逐一记录存档。
 模型中的精美博多人偶陶器采用福冈传统艺烧。如果仔细观察,能看到酒杯中和来宾头发上的梅花。留意官员们身着不同色的服装,表明了他的身份。
 这次聚会在日本文化中具有深的意《万叶集》(成8存最古老的日本集)中收32首在此次宴会上作的和歌。当今的日本政府和史学家正是从和歌序言里的字中受到启,将最新的年号命名令和(2019- )



 大宰府的食文 大宰府の食文化
 “木”,是了解公元8纪时大宰府(今太宰府,12以前的名称)食文化的宝依据。从大宰府和日本古都奈良出土的木上所刻信息,可以深入了解当的消内容。
 在730年初的那梅花宴,可能就有与的展示相类似的菜肴。左的丰富宴席,右侧则人群提供的较为简单
 为重要贵宾的菜包括野干、鲑鱼干、寿司、清酒蒸鲍鱼各类腌菜、鲷鱼鱿鱼等生片,以用糯米和艾叶制成的传统春季甜食)。如今,日本餐仍提供类似定食。
 在宴席的立体景模型中,可以看到一些客人着酒杯。与时节赏樱宴会,日本清酒在扮演着重要角色,甚至们创和歌(日本传统歌形式)的灵感。


令和——代的开  令和-時代の始まり

 在日本,每当新天皇就会生一个新年号志着一个新的开启。令和代始于20195月,而个年号便源自一名的梅花宴立体景模型展示了当。宴会上作的32首和歌(日本传统歌形式)以及一篇描述性的序言都收在《万叶集》生于8存最古老的日本集)之中。年号的”“均取自序言。的意思有些含糊,通常指命令,也有美好之意,但在《万叶集》中,它的意思更接近吉祥的意思很明确,表示宁静或和篇序言从句开始

初春令月,气淑……
(初春の令月にして、気淑く風和ぎ・・・)

 毫无疑一句不描写梅花盛开的景致,也表作者眼中当生机盎然的现实社会。更重要的是,诗创于大宰府(今太宰府,12以前的名称)个以外来文化而名的地区。令和二字的含义为日本社会及其未来提供了,暗示着乐观、强大的国关系、全球化和欣然接受不同文化的精神。




この英語解説文は観光庁の地域観光資源の多言語解説整備支援事業で作成しました。
This English-language text was created by the Japan Tourism Agency.
2024年 09月01日
歡迎光臨大宰府展示館(大宰府展示館 繁體案内)

歡迎光臨大宰府展示館 大宰府展示館へようこそ

 太宰府在12世紀以前被稱為「大宰府」本展示館主要介紹大宰府的古老故事
 1300年前大宰府是九州的行政中樞同時也是一大政治、宗教和文化中心更是日本通向世界之門由於日本位於古代連接東西方的貿易路線「絲綢之路」的東端,流經大宰府的物資和文化培養了當時在日本確屬罕見的國際主義、高素養以及學術性精神
 大宰府展示館著重介紹太宰府的悠久歷史在這裡遊客可以看到當時人們是如何利用當地自然地形防禦;觀賞如宮殿般精美的官署立體實景模型感受獨特的中國元素;了解人們衣著顏色與社會等級的關係;發現深受當地老百姓喜愛的各種珍奇美食除此之外,展廳一角的說明板介紹了持續至今的發掘工作長期的考古調,揭示了昔日大宰府的種種舊貌。
 太宰府與2019用的日本新年號也有著密切關聯,「令和」二字源於西元8世紀在大宰府舉行的一場梅花宴,宴上所創詩集的序文中寫道:於時初春令月氣淑風和
 請盡情享受古老的大宰府之旅吧!





大宰府立體實景模型:自然防禦 大宰府 再現ジオラマ 自然防衛
 
 太宰府在12世紀以前被稱為「大宰府」西元7世紀至12世紀大宰府是九州政治和文化中心從這個立體實景模型可以看出大宰府的選址充分利用了本地的地形特點周圍的山脈和地形巧妙地形成一個天然防線可有效抵禦入侵者
 由於毗鄰亞洲大陸大宰府是外國使團進入博多灣後的第一個停靠港自然就成為了重要的外交樞紐不過因為臨海它也容易受到來自國外的攻擊
 7世紀的亞洲大陸政治動盪663年兵敗於中國唐朝的日本對外防衛能力相當薄弱於是政府於664年下令修建「水城」這道防禦性城牆伴隨著綿延超過1.2公里的護城河可以阻擋來自今福岡市所在的沿海平原的潛在性攻擊為了進一步保衛城市當地還修建了數處堡壘要塞位於四王寺山頂的大野城就是其中之一今天仍可以看到這些防禦工事的遺跡
 當時大宰府是一座正方形的城市呈棋盤式布局面積約2平方公里屬古代東亞城市風格來自九州各地的人們包括高階官僚、商賈甚至外國使節都頻繁往來於此
 12世紀以後城市景觀慢慢發生了變化但作為政治中心的大宰府一直繁榮到了14世紀


大宰府官署模型 大宰府政庁の模型
 
 這是再現了8世紀時大宰府官署的模型12世紀以前太宰府被稱為「大宰府」當時絲綢之路貿易發達大宰府與中國和亞洲大陸聯繫緊密從建築的美感和對稱性等中國宮殿的特徵中就可以看出當時的官署深受中國影響
 這些建築遵循中國風水學和古代哲學理論建造正殿(行政大廳)坐北朝南吸收陽氣,行向上之運四王寺山山腳的地理位置則提供了自然防禦屏障
 官署屋頂上覆蓋著「鬼瓦」用以驅邪與中國古建築的獸面瓦當相似這裡展出的鬼瓦出土於大宰府張開的大嘴和凸出的眼睛強調了惡鬼憤怒的表情大廳內的地面和樓梯使用了裝飾有花草圖案的方形和三角形瓷磚
 官署遺址就在展廳外它曾經龐大而宏偉與太宰府這座繁華的國際大都市相得益彰可惜如今只剩下了基石



大宰府的顏色與等級制度 大宰府の色と位階
 
 在古代日本政府官員根據他們的官階穿著特定顏色的衣服顏色具有強烈的象徵意義如同展示中的模擬人物一樣,地方最高長官「帥」穿淺紫色官服,而其他官員也依照自己的身份地位穿著某種顏色當時等級極其重要和穿著指定顏色權利一樣等級決定了在官僚機構中從事特定工作的資格直到今天我們仍然可以在日本的神社中看到這種等級制度的痕跡比如在附近的太宰府天滿宮和灶門神社不同等級的神官就身穿不同顏色的衣服
 腰帶也具有重要意義展櫃左側的華麗腰帶與職等較低的官員佩戴的樸素腰帶形成了鮮明對比不過遺憾的是這些腰帶都係在衣服裡面並不顯眼
 這些扁平的木片是「木簡」有多種用途例如用來記錄課稅貨物的資訊木簡也很環保當不再需要上面的資訊時只要用鋒利的小刀削去表面的文字就能重複利用在紙張昂貴且稀缺的年代這種做法頗有價
 在展品的中央可以看到一枚硯臺和一塊墨條的複製品這塊船形墨是把松木煙灰和熬製的動物膠揉在一起製成的當時的文人墨客可能就使用這樣的書寫工具來記錄《萬葉集》中的一些和歌(日本傳統的詩歌形式)《萬葉集》是一部具有重要文化價的和歌選集,書中和歌來自日本各地,其中也有一些是在大宰府(今太宰府,12世紀以前的名稱)創作的詩歌






④ 西元8世紀的大宰府立體實景模型 8世紀の大宰府のジオラマ
 
 這個立體實景模型再現了西元8世紀時大宰府(今太宰府12世紀以前的名稱)的布局結構緊湊而繁榮大宰府的字面意思是「傳達天皇命令的偉大官衙」意味著它是重要的對外貿易樞紐、軍事要塞和政府行政中樞然而大宰府並非只專注政治它在日本文化和宗教方面也發揮著重要作用
 模型的最右端這片龐大的建築群名為觀世音寺是當時九州首屈一指的佛寺這裡曾有一座雄偉的五層佛塔但後來與其他許多建築一起毀於自然災害如今寺內只剩下一些重建的殿閣
與寺廟毗鄰的一所學校為來自九州北部的男孩提供教育學生們畢業後都留在九州成為當地政府官員
 大宰府官署位於四王寺山山腳下它得益於山體的天然防禦性並被由防禦牆和護城河組成的「水城」保護官署是一組宏偉的朱紅色宮殿式建築群以平城京(今奈良)的宮廷與殿宇為藍圖立體實景模型展示了8世紀時大宰府的布局結構但持續至今的發掘工作依然不斷在這座古都的規模和悠久歷史方面為我們帶來新的發現


⑤ 古代大宰府的發掘 古代大宰府の発掘

 大宰府(今太宰府12世紀以前的名稱)不僅是舉足輕重的行政和外交中心由於它和亞洲大陸的文化聯繫十分密切所以也是新思想和文化發展的交流中心然而隨著12世紀國家控制權落入武士和大名(大領主)手中這座城市的影響力逐漸式微考古學家在過去50年的發掘中逐漸明確了古代大宰府的規模挖掘的現場和航拍照片更是將昔日大宰府的城市設計和布局結構清晰地展示在人們面前
 遺址發掘結束後遺存被填平並用草覆蓋進行保護同時打上標記以表明地下埋藏物這種發掘後的處理方式既保護了自然景觀又彰顯了在地歷史有一些考古發現被特地保留並顯露出來以供展示例如這條排水溝其歷史可以追溯到西元8世紀早期大宰府展示館的外牆就是圍繞著它修建的
 中央的大石塊是建築物支柱的礎石它並非出土於此很可能是在附近發現後被移動到這裡展示
 博物館與本地社區密切合作鼓勵本地居民參與志工活動幫助保護並宣傳太宰府豐富的人文遺產及其在日本歷史上扮演的重要角色


梅花宴  梅花の宴

 這一處立體實景模型展現了西元730年在大宰府(今太宰府12世紀以前的名稱)最高長官——大伴旅人(665-731;身著紫衣者)將軍官邸舉行的「梅花宴」這些梅花樹中國引進在當時十分珍貴政府官員們聚在樹下食饌飲酒即興賦詩
 西元7世紀至12世紀是大宰府歷史上的黃金時代由於毗鄰亞洲大陸與其他王國交往頻繁大宰府的官員們不僅擅長外交和軍事還同樣精通詩詞歌賦對外國文化也有深度的理解和極高的鑒賞力參加梅花宴的人都不但能即興吟歌作詩並且創作題材廣泛從梅花、天氣到宴會氣氛可謂包羅萬象宴會上的官方記錄員則將他們創作的和歌(日本傳統的詩歌形式)逐一記錄存檔
 模型中的精美的博多人偶陶器採用福岡傳統工藝燒製如果仔細觀察還能看到酒杯中和來賓頭髮上的梅花請留意官員們身著不同顏色的服裝這表明了他們的身份
 這次聚會在日本文化中具有深遠的意義《萬葉集》(成書於8世紀、現存最古老的日本詩集)中收錄了32首在此次宴會上創作的和歌當今的日本政府和歷史學家正是從《萬葉集》中這些和歌序言裡的漢字中受到發,將最新的年號命名為「令和」(2019-



大宰府的飲食文化  大宰府の食文化
 「木簡」是了解西元8世紀的大宰府(今太宰府12世紀以前的名稱)飲食文化的寶貴依據從大宰府和日本古都奈良出土的木簡上所刻的資訊可以深入了解當時人們的消費內容
 在730年初的那場「梅花宴」上可能就有與這裡的展示相類似的菜餚左側是為高階官員準備的豐富宴席,右側則是為低階人群提供的簡單飯菜
 為重要貴賓準備的菜單包括野雞乾和鮭魚乾、香魚壽司、清酒蒸鮑魚、各類時令醃菜、鯛魚和魷魚等生魚片以及「草餅」(一種用糯米和艾葉製成的傳統春季甜食)直到現在日本餐廳仍提供類似定食
 在宴席場景的立體實景模型中一些客人舉著酒杯和現在櫻花時節的賞櫻宴會一樣日本清酒在席間扮演著重要角色甚至還能激發人們創作和歌(日本傳統的詩歌形式)的靈感



令和——新時代的開始  令和-時代の始まり
 在日本新天皇繼位時會誕生一個新年號這標誌著進入了一個新時代始於20195月的令和時代其年號便是源自一場著名的「梅花宴」立體實景模型就展示了當時的場景宴會上創作的32首和歌(日本傳統的詩歌形式)以及一篇描述性的序言都收錄在《萬葉集》(誕生於8世紀、現存最古老的日本詩集)之中年號的漢字「令」、「和」均取自序言「令」的意思有些含糊,通常指命令也有美好之意但在《萬葉集》中它的意思更接近吉祥「和」的意思則很明確,表示寧靜或和諧這篇序言從這句開始:

於時初春令月氣淑風和……
(初春の令月にして、気淑く風和ぎ・・・)

 這一句不僅描寫梅花盛開的景致也表現了作者眼中當時生機盎然的現實社會風貌更重要的是詩創作於大宰府(今太宰府12世紀以前的名稱)這個以歡迎外來文化而聞名的地方「令和」二字的含義為日本社會及其未來提供了積極視角暗示著樂觀主義、強大的國際關係、全球化和欣然接受不同文化的精神



この英語解説文は観光庁の地域観光資源の多言語解説整備支援事業で作成しました。
This English-language text was created by the Japan Tourism Agency.
2023年 03月13日
大宰府展示館 入館に際してのお願い
当館の取り組み
● 来館者の皆様に安心してご観覧いただけるよう、新型コロナウイルス感染症感染拡大防止のため、消毒液の設置や換気などの安全対策を実施します。

以下のお客様につきましては、ご来館をお控えいただきますようお願いいたします
● 体調がすぐれないお客様
● 発熱や風邪、臭覚、味覚障害の障害があるお客様

来館されるお客様へのお願い
● マスク着用のご協力をお願いします。
  また、咳エチケットの励行、入館時の手の消毒など、来館者の皆様がお互い安心してご観覧いただけるよう、ご理解、ご協力をお願いいたします。
● 館内での密集をさけるため、入館者数、入館時間を制限する場合がありますので、ご了承ください。
● 観覧される際は、他のお客様との距離をあけてご見学ください。
● 混雑状況によってはご入館をお待ちいただく場合がございます。ご理解とご協力をお願いいたします。


皆様のご来館を心よりお待ちしております。
 
2021年 11月26日
大宰府政庁跡に立つ三基の石碑
 古代日本の「西の都」~東アジアとの交流拠点~

 大宰府政庁跡を訪れると中央にひときわ目立つ3基の石碑が目に入ります。
 これらの石碑は今から約100年~150年前に大宰府跡の保護を願って建立されたものです。
 古代において地方最大の役所「大宰府」が置かれた政庁跡でしたが、機能が終焉(しゅうえん)した中世以降は荒廃が進みました。
 その後、近世・江戸時代以降になると礎石が抜き取られ、土地は田畑へ転用されて耕作地になるなど、さらに荒廃していきました。

 そのような中、明治4(1871)年、明治13(1880)年、大正3(1914)年と相次いで政庁跡に「大宰府」を顕彰する石碑が建立されました。

向かって左側  太宰府址碑(だざいふあとひ)  明治13(1880)年 建立
向かって中央  都督府古趾碑(ととくふこしひ) 明治4(1871)年  建立
向かって右側  太宰府碑(だざいふひ)       大正3(1914)年  建立

 地元の人々による「大宰府」保護への強い願いと深い想いの顕れであるこれら3基の石碑についてご紹介いたします。



太宰府址碑 明治13(1880)年8月建立

 刻まれている文章(碑文)は、黒田藩の学問所修猷館(しゅうゆうかん)の館長であった竹田定簡(たけださだひろ)の案を基に、福岡県令を務めていた渡辺清(わたなべきよし)が作成したと考えられています。

 碑文には、大宰府の由来をはじめ、時代と共に移り変わり行く中で今は礎石(そせき)を残すのみとなった大宰府跡が、廃墟となり跡形もなく消え去ってしまう事を嘆き、御笠郡(みかさぐん)の人々がこの碑を建立した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
 この500字程に及ぶ碑文の文字を書いたのは、明治時代を代表する書家として知られる日下部鳴鶴(くさかべめいかく)です。彦根藩に生まれた鳴鶴は官僚として活躍しますが、40歳の時に官を辞して、書の道に生きました。石碑にある東作(とうさく)は本名です。
 また、碑文の上に大きく篆書体(てんしょたい)で書かれた「太宰府址碑」の字は有栖川宮熾仁親王(ありすがわのみやたるひとしんのう)の筆とされます。親王は明治新政府の総裁を務めるなど活躍した人物ですが、西南戦争の指揮のため九州を訪れたり、大宰帥(だざいのそち)や福岡県令を務めるなど福岡と縁深い人物でもありました。

〔太宰府址碑 碑文〕 (PDFファイル 120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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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督府古趾碑 明治4(1871)年7月建立

 正殿跡にある3基の石碑の中で最も古いものです。
 石碑を建立した高原善七郎は御笠郡乙金村(おとがなむら)〔現在の福岡県大野城市〕で代々庄屋を務める家に生まれました。
 33歳で大宰府跡が所在する観世音寺村(かんぜおんじむら)庄屋を務めるなど活躍すると共に、地域に残る文化財の調査や保存、顕彰(けんしょう)などにも努めました。

 81歳で政務を引退した善七郎が最後に取り組んだのが政庁跡への石碑建立でした。歴史ある大宰府跡が荒れ果て、人々に忘れ去られていくことに心を痛めていた善七郎は、明治3(1870)年に長年の悲願であった石碑建立を願い出ました。明治4(1871)年に無事建立され、その様子を見届けるかのように建立の翌年(1872年)に善七郎は永眠しました。
 石碑にある「都督府(ととくふ)」は古代中国の役所の名称で、菅原道真(すがわらのみちざね)公が漢詩「不出門(ふしゅつもん)」で大宰府を中国風に「都府(とふ)の楼には・・・」と表現したことに由来しており、現在も大宰府政庁跡は都府楼跡(とふろうあと)と呼ばれ親しまれています。

〔参考:高原善七郎の石碑建立の願書控〕(PDFファイル 56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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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宰府碑 大正3(1914)年8月建立

 政庁跡の3基の中で建立が最も新しいものですが、石碑の文章が作られたのは最も古いものです。
 碑文を作ったのは儒学者・医者であり福岡藩西学問所・甘棠館(かんとうかん)の学長を務めた亀井南冥(かめいなんめい)です。
 南冥は寛政元(1789)年11月に文章を完成させましたが、碑文の一部「當今封建國邑(まさにいまこくゆうをほうけんし) 名器非古(めいきいにしえにあらず)」が体制批判であるとされ、石碑の建立は中止されてしまいます。

 この時期は福岡藩内で学閥(がくばつ)争いがあり、やがて幕府の命令により朱子学以外の学問が禁止されると、南冥は職を解かれ謹慎のとなり、文化11(1814)年失意のうちに亡くなります。
 その後、南冥の志を受け継いだ門下生などの尽力により、南冥没後100年の大正3(1914)年に石碑が建立されました。

〔太宰府碑 碑文〕(PDFファイル 151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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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絵葉書から見る政庁跡の石碑

戦前発行の絵葉書に写された政庁跡や石碑の風景をどうぞご覧ください。


絵葉書 その1 PDFファイル 290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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絵葉書 その2 PDFファイル 274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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絵葉書 その3 PDFファイル 304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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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雨天時は大宰府展示館へどうぞ

大宰府展示館では太宰府拓友会の皆様に採取いただいた三基の石碑の拓本を展示しております。
雨天時など、現地での石碑見学が難しい場合はぜひ大宰府展示館をご利用ください。


〔参考文献〕
・太宰府市文化ふれあい館『拓本でたどる保存の心』2006年
・太宰府市文化ふれあい館『碑帖辿歴 拓本で紡ぐ史跡のかたち』2019年

2021年 11月12日
古代の大宰府を眺めてみよう「大宰府条坊イメージジオラマ」公開中です
■はじめに
 太宰府市の中央に位置する大宰府政庁跡には、7世紀後半から奈良・平安時代にかけて九州の政治・文化の中心となり、東アジアの国々との外交の窓口、軍事防衛の拠点として重要な役割を担った役所が置かれていました。
 この大宰府政庁跡に隣接する大宰府展示館は、昭和55年の開館以来、大宰府史跡の発掘調査で見つかった貴重な遺構を保存公開し、出土遺物や模型などで大宰府の歴史と文化をご紹介してきました。近年では、元号「令和」の典拠となった「梅花の宴」を博多人形で再現したジオラマを展示していることから、全国各地から多くのお客様にお越しいただいております。
 このたび、古代の大宰府をイメージしていただける「大宰府条坊 イメージジオラマ」を新たな展示資料として公開する運びとなりました。ぜひ一度、大宰府展示館へ足をお運びくださいませ。


 
■資料について
 今回新たに展示します資料は「大宰府条坊イメージジオラマ」です。
 古代の大宰府には約2km四方の街並みが広がり、内部は条坊制(じょうぼうせい)と呼ばれる奈良・平城京のような碁盤の目状の区画がされていました。
 大宰府の条坊についてはこれまで研究が重ねられており、近年は太宰府市教育委員会文化財課・井上信正氏が提唱する南北22条・東12坊・西8坊、1区画が90m四方の想定案が注目されています。
 本資料では、条坊の街並みのうち朱雀大路を中心に客館や南館、般若寺などの主要施設を含む、南北は8条から22条、東西は朱雀大路を中心に各6坊ずつの範囲を制作しています。

■資料詳細
 平面部分:750分の1スケール
 建物の高さ・地形の高さ:実際の縮尺で制作すると視認し辛い為、それぞれ視認しやすい任意の比率に高めて制作されています。
 サイズ:150cm×190cm


■古代大宰府の街並みについて
 古代大宰府の街並みは、中国・唐の長安にならった平城京や平安京と同じく、北の中央に中心となる施設・政庁(せいちょう)が置かれました。
 この政庁を起点として、南へ延びる朱雀大路 (すざくおおじ)を中心に碁盤の目のように道路が走り、街並みを区画する条坊制(じょうぼうせい)が広がっていたようです。
 条坊制に基づいて大宰府の街並みが造られていることは、大宰府が自然発生した都市ではなく、国家が主導して建設した都市であることを意味しています。当時の中国を中心とした東アジアの枠組みの中で、国際的な役割を担う都市として位置づけられていたようです。
 古代大宰府の街並みについては、大宰府史跡の発掘調査が進むなかで様々な復元案が検討されてきました。
 条坊制では東西を結ぶ列を条(じょう)、南北を結ぶ列を坊(ぼう)と呼びますが、現在では22条、朱雀大路を中心に東側に12坊、西側に8坊、それぞれの一区画が90m四方の街並み復元案が提示されています。


※赤枠部分が今回のジオラマで制作された範囲となります。
(図:太宰府市教育委員会文化財課 井上信正氏作成のものに一部加筆)


■ジオラマのイメージした時代8世紀後半ごろの大宰府について(赤枠内がおおよその時期)



■ジオラマ内の各所解説

朱雀大路(すざくおおじ)
 古代日本の都において、中央を南北に通じる主要道路を朱雀大路と呼びますが、大宰府の街並みにも大路が存在していました。大路は8世紀初頭頃に工事が行われたと考えられており、大宰府政庁の南側に位置する朱雀門からまっすぐ南へと延びています。
 大路は奈良・平城京の朱雀大路の半分の規模で設計されたようで、幅は36mほどありました。現在の高速道路10車線分にあたる幅ですが、8世紀後半から9世紀にかけて30mほどに、11世紀には15mほどになった箇所もあるなど、時代と共に大路の役割が変化するなかで道幅も縮小していったようです。

客館(きゃくかん)
 客館とは、外国からの使節たちが滞在するための施設です。古代における大宰府は、諸外国とのやりとりを行う窓口として重要な役割を担っていたため、政庁で外交儀礼などが行われました。
 海を渡ってやってきた外国の使節たちは、博多湾沿いの筑紫館(鴻臚館)にまず滞在し、その後、官道を進み、水城の西門を通り、大宰府の街並みへ南側から入り、客館に滞在しました。客館跡では青銅で出来たお鋺や皿、スプーン、貴重な陶磁器などが見つかっており、豪華なおもてなしが行われていたようです。

南館(なんかん)
 大宰府の街並みの中央を南北に貫く朱雀大路沿いには、大宰府で働く身分の高い役人(高官)の館が存在していたようです。901年、都から大宰府へ流されてきた菅原道真公は高官用の館に滞在しましたが、手入れも悪く、大変荒れ果てた様子だったようです。道真公が滞在した館は「府の南館」とも呼ばれ、道真公の死去後には浄妙尼(じょうみょうに)を祀る祠が建立され、現在は榎社が鎮座しています。
 また、榎社の周辺からは平安時代に公卿(くぎょう)(上流貴族)だけが着用を許された白玉帯(はくぎょくたい)の飾り(正方形をした巡方(じゅんぽう))も見つかっていることから、朱雀大路沿いにおける高官たちの活動がうかがえます。

般若寺(はんにゃじ)
 筑紫大宰帥(だざいのそち)であった蘇我日向(そがのひむか)が孝徳天皇(こうとくてんのう)の病気平癒を祈り、654年に建立したといわれる古代の寺院です。太宰府市朱雀(すざく)二丁目には般若寺という字名があり、現在も住宅地の一角に塔跡の一部と心礎(しんそ)(塔の中心柱の土台となる石)が残っています。
 般若寺は天皇ゆかりの寺院ですが不明な点も多く、筑紫野市にあった塔原廃寺(とうのはるはいじ)が奈良時代に入り大宰府へ移転したという説もありますが、諸説あり未だ確定はされていません。

■制作者 森野 晴洋(もりの はるひろ)様 広島県在住。
 歴史に関心を持っておられたが、大学時代を福岡で過ごしたなかで古代大宰府についても関心を持ち、古都大宰府をイメージできるようなものがあれば太宰府市を訪れる方々もより関心を持っていただけるのではと思案。
 そこで模型作りの特技を活かし、奈良市役所の平城京復元模型、京都市平安京創生館の平安京復元模型のような一目で往時の様子が分かるジオラマ制作を考え、古都大宰府保存協会にご相談いただいたのが制作の発端でした。
 それから約2年の歳月をかけて、当会からも参考資料などを提供し協議を重ねながら、社会貢献の一環としてボランティアで制作いただいた作品です。

 
2021年 09月29日
大宰府展示館は10月1日(金曜日)より開館いたします
新型コロナウイルス感染拡大防止のために臨時休館しておりましたが、緊急事態宣言解除に伴い10月1日(金曜日)より開館いたします。
皆様のご来館を心よりお待ちしております。

大宰府展示館のご案内はこちらから

入館に際してのお願いはこちらから

緊急事態宣言の解除と今後の対応について(太宰府市)はこちらから
2021年 03月27日
Welcome to Dazaifu Exhibition Hall(大宰府展示館 英語案内)

Welcome to Dazaifu Exhibition Hall 大宰府展示館へようこそ

Dazaifu Exhibition Hall is dedicated to telling the story of Dazaifu. Thirteen centuries ago, Dazaifu was the administrative center of Kyushu, as well as a political, religious, and cultural powerhouse. The city was also Japan’s gateway to the outside world. As Japan was located at the eastern end of the Silk Road—the ancient trade route that connected the East to the West—the culture and goods that flowed through Dazaifu created a spirit of internationalism, sophistication, and scholarship that was rare in Japan at the time.
   Dazaifu Exhibition Hall tells the story of Dazaifu’s rich history. Discover how the area’s natural topography was exploited for defensive purposes; look at detailed dioramas of the palatial government offices and notice the distinctive Chinese influence; find out how the colors people wore were connected to their rank and occupation, and learn about the unusually varied cuisine enjoyed by residents of the city. The photo gallery highlights the ongoing excavation process that is revealing much of ancient Dazaifu.
   Dazaifu is closely related to the name of the Japanese era beginning in 2019, Reiwa. The naming of Reiwa has its origins in poems crafted at a plum blossom party that took place in Dazaifu in the eighth century.
   We hope you enjoy your journey back to the world of ancient Dazaifu.






Dazaifu Diorama: Natural Defenses 大宰府 再現ジオラマ 自然防衛
 
Dazaifu was Kyushu’s de-facto political and cultural center between the seventh and twelfth centuries. The city’s location was carefully chosen to take advantage of the topographical features of the area. The diorama shows how the surrounding mountains and landscape formed a natural bottleneck, offering a strong degree of protection from would-be invaders.
   Dazaifu’s proximity to mainland Asia made it a major diplomatic hub. The city was the first port of call for foreign delegations who docked in Hakata Bay. However, the government feared that its proximity to the sea rendered the city susceptible to attacks from foreign forces, as in the seventh century the Asian continent was a place of political unrest. Thus, it ordered the building of Mizuki—a defensive wall with an extensive moat that stretched over 1 kilometer—to thwart potential attacks from the coastal plain where the city of Fukuoka is now located. Fortresses were constructed to provide further protection, including Ono Fortress on the top of Mt. Shioji. You can still see the remains of these defenses today.
   When visiting dignitaries arrived in Dazaifu, they stayed in a special Guest House. The area outlined in yellow highlights this location. While the visitors were in residence, the Guest House was effectively an extension of their home country—somewhat similar to the case of foreign embassies today.


Model of the Dazaifu Government Offices 大宰府政庁の模型
 
This is how the Dazaifu administrative complex would have looked in the tenth century, a time defined by the Silk Road trade and strong ties with China and the Asian continent. Chinese influences can be seen in the aesthetics of the structures and in their symmetry, a common feature of Chinese palaces.
   The buildings were painted a bright vermilion, also known as Chinese red. The color carried associations with life and rebirth and was thought to ward off evil. The buildings were constructed following the Chinese philosophical theories of wuxing—a concept based around the interconnection of five phases or five elements—and feng shui. The main administrative hall was built facing south, which offered positive feng shui, and its location at the base of Mt. Shioji offered natural protection.
   The roofs of the halls featured onigawara “demon” tiles to scare off evil in a similar fashion to gargoyles on medieval cathedrals in the West. The onigawara on display was excavated in Dazaifu and the open maw and bulging eyes accentuate the creature’s wrathful features. Inside the halls, square and triangular tiles adorned with flower and plant imagery were used for the floors and stairs.
   The grounds where the administrative complex once stood are directly outside the Exhibition Hall. While only foundation stones remain today, it was once an expansive and grand complex befitting the powerful and cosmopolitan city of Dazaifu.



Color and Hierarchy in Dazaifu 大宰府の色と位階
 
Color was deeply symbolic in ancient Japan. Government officials wore certain colors based on their occupation and rank. The governor-general wore light purple, similar to the figure seen in the display. Those in other occupations also wore status-specific colors. Rank was also extremely important. It determined the eligibility for specific jobs in the bureaucracy as well as the right to wear designated colors. You can still see signs of this hierarchical system today in shrines across Japan, including at nearby Dazaifu Tenmangu and Kamado Shrine, where priests wear specific colors based on their rank.
   Belts were imbued with significance too. The ornate belt seen on the left in the display cabinet would have contrasted with plainer belts worn by lower-ranking officials. Ironically, these belts were worn beneath the clothing and therefore out of sight.
   The flat wooden tablets are mokkan. These were used for a variety of purposes, such as recording information about taxable goods. Mokkan were also eco-friendly. When no longer required, the thin layer of wood with writing on it would be shaved off with a sharp knife and the tablets re-used. This was a valuable feature at a time when paper was expensive and a scarce commodity.
   In the middle of the display, you can see an inkstone and a reproduction of an ink stick made from pine soot. The soot was kneaded together with glue and then fashioned into the boat-like shape seen here. It is possible that scribes of the day used writing equipment like this to record some of the poetry found in the Man’yoshu—a large and culturally important anthology of poetry from across Japan, including verse composed in Dazaifu.





Diorama of Eighth-century Dazaifu 8世紀の大宰府のジオラマ
 
This diorama depicts how the compact yet powerful city of Dazaifu was laid out in the eighth century. Dazaifu literally translates as “Great Government Administrative Headquarters,” and the city was a vital foreign trade hub, military stronghold, and government administrative center. However, Dazaifu was not devoted solely to politics. It als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Japanese culture and religion.
   At the far right of the diorama you will find Kanzeonji Temple as it used to look when it was an immense complex and the leading Buddhist temple in Kyushu. A handsome five-story pagoda once stood on the grounds, but this was destroyed along with numerous other buildings by natural disasters, and only a few structures (none of them original) remain today.
   A school adjacent to the temple educated boys from northern Kyushu, and these young scholars went on to become government officials stationed on the island. To this day, Dazaifu is considered a center of scholarship. Millions of high school students make pilgrimages to Dazaifu Tenmangu every year to pray to Tenjin—the spirit of scholar and politician Sugawara Michizane (845–903) who was enshrined there and regarded as the deity of learning. Students pray for his blessing and for success in their exams.
   The government offices were located at the foot of Mt. Shioji and benefitted from the natural protection of the mountain and Mizuki, the defensive wall and moat. This administrative center was a palatial complex with grand vermilion-painted structures and was modeled on Heijo-kyo, the imperial court and palace located in modern-day Nara. This diorama gives an idea of the scale of Dazaifu in the eighth century, but ongoing excavations are revealing more about the scale and history of this ancient city.



Revisiting Ancient Dazaifu 古代大宰府を再訪


Dazaifu was once a key center of government administration and international diplomacy. The area had strong cultural links with the Asian mainland and was a hub of new ideas and cultural developments. However, as control of the country fell into the hands of samurai and feudal lords in the twelfth century, the city’s influence waned. Excavations over the past five decades have revealed the scale of ancient Dazaifu, and archaeological digs and aerial photos provide a much clearer idea of Dazaifu’s former design and organization.
   After sites are excavated, they are filled-in and covered with grass to protect the remains, and the area is marked to show what lies beneath. This post-excavation process has the dual role of preserving the natural landscape and highlighting the history of the area. A few examples of the finds are deliberately left visible, such as this drainage ditch. The ditch dates to the early eighth century and has been preserved in its original location. The walls of the Exhibition Hall were built around it.
   The museum works closely with the local community, listening to concerns and ensuring the ongoing excavation work does not disrupt residents. It involves local residents in volunteer projects to help preserve and convey information about Dazaifu’s rich heritage and role in Japanese history.



Plum Blossoms and Poetry 梅花と詩
This diorama depicts a plum blossom party held at the official residence of Dazaifu Governor-General Otomo Tabito (dressed in purple) in 730. Government officials gathered under the plum trees—introduced from China and considered a rarity at the time—to eat, drink, and compose improvised verse together.
   This party has deep significance for Japanese culture. Thirty-two poems composed at this gathering can be found in the Man’yoshu (the oldest extant anthology of Japanese poetry, dating to the eighth century). The Reiwa era (2019–) was so named after modern-day Japanese government officials and historians were inspired by the kanji characters contained within the preface to these poems in the Man’yoshu.
   The seventh to twelfth centuries were a golden period in Dazaifu’s history. During this time, Dazaifu government officials had a keen understanding and appreciation of foreign cultures due to the city’s proximity to the Asian mainland and frequent interaction with other kingdoms. They were skilled in diplomacy and the military arts but were also expected to be accomplished poets. The plum blossom partygoers would have used their skills to improvise poems on such subjects as the blossoms, the weather, and the prevailing atmosphere of the gathering. An official scribe recorded the verses as they were recited.
   The Hakata Ningyo dolls in this tableau are very fine examples of pottery unique to Fukuoka. If you look closely, you can see plum blossoms in the sake cups and in the attendees’ hair. Note that the officials are wearing different colored garments indicative of their status.
   Plum trees have a special significance in Dazaifu. The grounds of Dazaifu Tenmangu Shrine are full of plum trees, including the fabled “flying” plum tree, tobiume. Legend tells the story of the plum tree of a Kyoto garden that uprooted itself and flew from Kyoto to Dazaifu to be close to Sugawara Michizane after the statesman and scholar was exiled from the city.
 
Who was Sugawara Michizane?
Sugawara Michizane (845–903) was a scholar and politician. After his death, his spirit was deified and enshrined at Dazaifu Tenmangu as Tenjin. He is known as a guardian of learning, culture, and the arts. Michizane had a particular liking for plum trees.



Dazaifu Food Culture 大宰府の食文化
Mokkan wooden tablets give us valuable insight into the food culture of eighth-century Dazaifu. Based on the information inscribed on tablets excavated in Dazaifu and Nara, the ancient capital, we have a good idea about what was consumed during this time.
   Foodstuffs, similar to the ones displayed here, were likely served at the “plum blossom party” in early 730. High-ranking officials were served the rich and varied spread on the left, while the more modest fare on the right was for lower-ranking participants.
   The menu for the most important guests included dried cuts of pheasant and salmon; ayu (sweetfish) sushi; abalone steamed in sake; various types of pickles; sea bream, squid, and other types of sashimi; and kusamochi, a traditional spring confection made from sweetened, pounded rice and the leaves of Japanese mugwort. Similar foodstuffs can still be found in Japanese teishoku (set meal) restaurants today.
   A few guests can be seen raising sake cups in the party diorama. Sake played a pivotal role at the party—as it does today at hanami parties celebrating cherry blossoms—and likely helped fuel the creativity of the guests as they crafted their poetry.



Reiwa—the dawn of an era 「令和」-時代の始まり
In Japan, a new era is born whenever an incoming emperor ascends the Chrysanthemum Throne. The Reiwa era began in May 2019, but the roots of its name are linked to the famous plum blossom party depicted in the diorama. Thirty-two poems composed at the party, along with a descriptive preface, appear in the Man’yoshu—the oldest extant collection of classical Japanese poetry. The two kanji characters that make up the era name, “Rei” and “Wa,” are taken from the preface. The meaning of the second character, “wa,” is unambiguous: “tranquility” or “harmony.” The first character, “rei,” typically means “command” or “order” in modern Japanese, but in the Man’yoshu passage in question, it means “beautiful,” “fine,” or perhaps “auspicious.” The poem begins as follows:


   It was the fine (rei) month of the advent of spring

   The air was clear and gentle (wa) breezes were blowing….


   Arguably, this passage seeks to capture the buoyant mood of not just the flowering of the plum trees but contemporary society as the author sees it. It is perhaps significant that the verses were written in Dazaifu, an area known for welcoming foreign cultures. In this sense, the nuance behind the characters for Reiwa offers a positive take on Japanese society and the future, hinting at an ethos of optimism, strong international relations, globalization, and appreciation for different cultures.



この英語解説文は観光庁の地域観光資源の多言語解説整備支援事業で作成しました。
This English-language text was created by the Japan Tourism Agency.
2020年 03月18日
おうちで「だざいふ」チャレンジ!牛乳を使って、古代の「蘇(そ)」を作ってみよう♪

〔おうちにいるみんなへ〕

 新型コロナウイルスが広まって学校などがお休み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
 そこで、お休みのあいだの時間を使って、おうちで牛乳を使ってかんたんに出来る「蘇(そ)」作りにチャレンジしてみませんか?
 むかしの人たちが食べていた「蘇」って一体どんな味がするのでしょう?
 その味は出来てからのお楽しみです♪
 

【保護者の皆様へ】
 福岡県では新型コロナウイルスの感染拡大を防止するため学校が一斉休校となっています。
 公益財団法人である古都大宰府保存協会は大宰府の歴史や文化を広く発信していくことを事業の1つとしておりますが、今回の長期間の休校をうけ、子供たちが自宅で太宰府の歴史や文化などに親しみながらチャレンジできることを何かご提案できないか、という思いから様々な取り組みを行っています。
 今回ご紹介する「蘇」は、1000年以上前の人々が食べていた古代食の一つです。学校が休校となり給食用の牛乳が余るなか、牛乳とホットプレートと1時間程度の作業時間があれば簡単にご家庭で出来るものです。ぜひこの機会に試してみてはいかがでしょうか。
 

◆準備するもの
・牛乳 適量
(煮詰めていきますので、出来上がりは元の量の大体10分の1くらいになります)
(本コーナーでは1リットルのものを使用しています)
・ホットプレート
(ガスコンロ等でも調理可能ですが、お子様とチャレンジされることを想定し、火を使わないホットプレートなどを推奨しております。また、ホットプレートは複数使用されますとブレーカーが落ちやすくなりますので、複数で作る際はご留意下さい)
・牛乳をかき混ぜるヘラなど

※調理時間の目安 1時間程度


〔保護者の皆様へ〕
太宰府市にあります永利牛乳は、市内の学校をはじめ福岡県内9市3町の学校給食へ牛乳を届けている会社です。給食の時間に飲まれた記憶がある方も多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現在、太宰府市では「ふるさと納税」などを通じて休校中における生産活動の支援をしておりますので、永利牛乳株式会社太宰府市「ふるさと納税」関連ページもあわせてご覧頂ければ幸いです。



蘇とは?
 「蘇(そ)」は「酥(そ)」ともいわれるもので、むかしの人たちが牛乳を煮つめて作って食べていたものです。
 今から1200年前の平安時代(へいあんじだい)につくられた『和名抄(わみょうしょう)』という辞書には、酥(そ)は牛などの乳から出来ているということが書かれています。
 同じ平安時代の『延喜式(えんぎしき)』という法律をまとめたものには、「蘇(そ)」の作り方が書いてあります。
(『延喜式』「民部下」) 作蘇之法、乳大一斗煎、得蘇大一升
 少し文章が難しいですが、大1斗(約7.2ℓ)を煎じる(煮つめる)と大1升(約720㎖)の蘇を得られるということが書いてあり、蘇は牛乳をあたためて10分の1まで煮つめて作っていたようです
(※「升」や「斗」は当時使われていた量の単位で、大1升を10倍すると大1斗になります。詳しくは後ほどご紹介していますので合わせてご覧ください)
 
 今から1000年以上前の奈良時代や平安時代は牛乳がとても貴重でしたので、その牛乳を10分の1まで煮つめる蘇はもっと貴重でした。そのため蘇は天皇(てんのう)や貴族(きぞく)などが食べるとても豪華な食品でした。
 また、栄養満点の牛乳から作るので、むかしの人たちは病気の時にも食べていたようです。その他にも、仏さまへのお供えものとしてお坊さんたちにも大事にされていたようです。
 やがて蘇は日本全国で作られるようになり、大宰府からも都へたくさんの蘇が運ばれていた記録が残っています。
 
 ただ、残念なことに蘇の詳しいレシピは残っていません。ナゾの多い蘇を、ぜひ自分で作ってどんな味がするのか確かめてみましょう!


蘇を作ってみよう! 蘇の作り方
ホットプレートを180℃~200℃前後に温める

用意していた牛乳を流し込む


あとは牛乳が焦げないようにかき混ぜつつ、粘り気が出るまで煮つめる

 
ポイント1
 ホットプレートの縁などに付いてしまった牛乳は、焦げないうちに内側に削いで「だま」にならないようにかき混ぜましょう。また、かき混ぜないと表面に膜が出来てしまうので、固まらないよう気をつけてかき混ぜましょう。

ポイント2
 焦げ目が少ないと、風味が良く、美しい乳白色に出来上がります


出来上がるまでは1時間前後かかります。「蘇」についての色々なお話を下の方に載せていますので、牛乳をかき混ぜながら「蘇」のことをさらに知ってみましょう♪

 
1時間程煮つめていると牛乳の水分が飛んで、粘り気が出てきます。さらに固まってきたら、最後はサランラップなどにくるんで形を整えましょう。サランラップの空き箱などを使うと四角い形にするのに便利です。
 

熱が冷めて固まったら、お好きな形に切り分けて食べましょう♪

(※温かいままでも美味しく食べられます。形を整えて切る場合は冷蔵庫で1時間ほど冷やすと切りやすくなります)
 お好みでトッピングをするとより美味しくなるかも?
 1300年前の人たちも食べていた「蘇」をどうぞお召し上がり下さい。
 



蘇を煮つめてかき混ぜる間のよもやま話
蘇が出来上がるまで1時間ほどかかります。
牛乳をかき混ぜている間、蘇にまつわる色々なお話をみてみましょう♪
 
○蘇を食べる時はどんな時?
 
公益財団法人古都大宰府保存協会所蔵 饗宴(きょうえん)の膳(ぜん)と蘇(そ)の再現模型

博多人形による「梅花の宴」再現ジオラマ(山村延燁作)
 

 貴族の人たちが開く宴会(えんかい)など色々な時に食べられていたようです。
 天平2(730)年1月13日に大宰府で行われた「梅花の宴(ばいかのえん)」は、みんなが使っている元号(げんごう)「令和(れいわ)」の由来となった行事ですが、その時の食事でも出されていたと考えられています。大宰府展示館では、その時の食事の模型を展示していますので、新型コロナウイルスが治まったらぜひ遊びに来てください。
 
 また、栄養満点の牛乳から作られた蘇は病気の人が元気になるためにも食べられていたようです。
 中国の唐(とう)で作られた本で、遣唐使(けんとうし)の人たちが海を渡って日本へ持ち帰り、お医者さんの教科書として使われた『新修本草(しんしゅうほんぞう)』という本があります。
 この中で蘇は、内蔵をおぎなって、大腸を良くして、口の中のケガに効く食べ物として紹介されています。

 平安時代の貴族として有名な藤原道長(ふじわらのみちなが)は、長和5(1016)年に重い病気にかかりましたが、その時に薬として蘇と蜜(みつ)を煮たものを食べたことが記録にあります。このように蘇は薬のように使われてもいたようです。


○蘇の原料となった牛乳はいつから使われていたの?
 奈良時代に活躍した長屋王(ながやおう)という偉い人が住んでいた家の跡から「牛乳」と書かれた木簡(もっかん:木の板に墨で文字を書いたもの)が見つかり、1300年前の奈良時代から牛乳が使われていたことが分かりました。


○むかしは牛からどれくらい牛乳が採れたの?
 最初にもお話しした平安時代の『延喜式(えんぎしき)』という法律をまとめたものには、牛から採れる牛乳の量が書いてあります。
(『延喜式』「民部下」)其取得乳者、肥牛日大八合、痩牛半
 よく育った牛からは1日に大8合(約576㎖)、痩せた牛からはその半分(約288㎖)の牛乳が採れたようです。
 現在の乳牛はエサも美味しくなり、技術も進歩したので、平均して1日に20ℓ~30ℓほど採れるそうです。
 むかしの牛乳がとても貴重だったことが分かりますね!



★むかしの人たちが使っていた「量」
 じつは奈良時代などむかしの人たちが量るために使っていた「升(ます)」の大きさがどのくらいだったのか詳しく分かっていません。
 これまで色々な人たちが調べてきましたが、現在では沢田吾一(さわだごいち)先生が調べた「当時の大1升=現在の約4合(約720㎖)」ではないかと考えられています。
 このページでも沢田先生の計算に基づいてご紹介しています。

 
大1合  約72㎖
大10合 = 大1升
 
小1升  約240㎖
小3升  = 大1升
 
大1升  約720㎖
大10升 = 大1斗
 
大1斗  約7.2ℓ
 


○大宰府でも蘇を作っていたの?
 平安時代には日本各地で蘇が作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そこで日本全国を6つの地区に分けて6年に1回ずつ、それぞれの地区が担当して決められた量の蘇を都へ送っていたことが、何度もご紹介している『延喜式』に書かれています。
 大宰府は5番目の地区で、巳亥年(現在だと干支(えと)の「へび年」と「いのしし年」)の担当として、都へ70壺の蘇を送ることが決められていました。
 
大宰府が都へ納めていた蘇の量はどれくらい?
 
(『延喜式』「諸国貢酥番次」)
第五番巳亥年 大宰府 七十壺
十五口  各大一升
三十五口 各大五合
二十口  各小一升
 
大宰府から都へ送る70壺は、それぞれ大きさも決まっていました。
70壺のうち15個は大1升、35個は大5合、残りの20個は小1升だったようです。
 
これを計算すると、
15×約720㎖ = 約10.8
35×約360㎖ = 約12.6
20×約240㎖ = 約4.8ℓ
 
合計で約28.2ℓとなり、とても多くの蘇が都へと送られていた事が分かります。

 現在の太宰府市には九州一帯をまとめる「大宰府(だざいふ)」という役所がありましたので、九州各地で作られた蘇は、まず大宰府に送られて、大宰府でまとめてから都へと送られていきました。
 
 ただし、牛乳がよく採れるかは自然にも影響されますし、都から遠い大宰府ですので届くのが遅れることもあったようです。
 永延2(988)年の正月20日、摂政(せっしょう)という高い身分にあった藤原兼家(ふじわらのかねいえ)という人が、自宅で大きな宴会を開くこととなりました。そのため、朝廷(ちょうてい)から兼家に蘇が送られるはずでしたが届きませんでした。
 実は、この年の蘇を担当していたのは大宰府だったのですが、都に届くのが遅れていたようです。結局、大宰府からの蘇は20日夕方に都に到着し、翌21日に無事に兼家のもとへ届けられました。


主な参考文献
白崎昭一郎「蘇について」1982年 『日本医史学雑誌』28巻
永山久夫『日本古代食事典』1998年 東洋書林
佐藤健太郎「古代日本の牛乳・乳製品の利用と貢進体制について」2012年 『関西大学東西学術研究所紀要』45巻

◇蘇つくりの写真
太宰府市でむかしの人たちが食べていた物や歴史、文化を研究(けんきゅう)している「常若の会(とこわかのかい)」のみなさんが作っているところにお邪魔して撮らせていただいたものです。(2018年7月18日撮影)
 
 


〔更新履歴〕
・2020年3月18日 公開開始
・2020年3月19日 数量の表記間違いを修正・大宰府から送られていた蘇の量を追記
2019年 08月12日
大宰府条坊 客館周辺 再現ジオラマ  古代の大宰府を覗いてみよう2!!

※2021年11月12日より、新たなジオラマ「大宰府条坊イメージジオラマ」と統合した展示へと変更いたしております。

大宰府(だざいふ)条坊(じょうぼう) 客館(きゃくかん)周辺(しゅうへん) 再現(さいげん)ジオラマ
時代:8世紀後半 製作:森野(もりの)(はる)(ひろ)

古代大宰府の街並みは、地方最大の役所であった「大宰府(だざいふ)」を中心として広がっていました。様々な人や物が行き交い、海外との交流も盛んであった大宰府は大変(にぎ)やかな都市だったようで、769年に大宰府から都へ出された申請書には、「この府、人物(いん)(ぱん)にして、天下の一都会なり」と記されています。
古代大宰府の全容(ぜんよう)は未だ明らかではありませんが、今回、森野氏に発掘調査報告書などを基に、推定などを含めながら8世紀後半頃における大宰府の街並みの中心部分を製作いただきました。
朱雀(すざく)大路(おおじ)を中心に広がる街並み、客館(きゃくかん)での儀礼(ぎれい)の風景、道を行き交うたくさんの人々や暮らしの様子など、再現された活気あふれる街並みを是非ご覧ください。



朱雀(すざく)大路(おおじ)街並(まちな)
朱雀大路は、大宰府の街並みを中央にはしる大きな道です。大宰府政庁(せいちょう)の南側に位置する朱雀門からまっすぐ南へと延びており、その幅は現在の高速道路だと10車線分にあたる幅36mほどありました。
朱雀大路の両側には、90m四方(しほう)に区画された条坊制(じょうぼうせい)の街並みが広がっていたようです。区画の中はさらに分割されて、多くの家が建ち並び、人々が生活していたようです。「天下之一都会」ともいわれた古代大宰府の賑わいがうかがえます。

多くの人々が行き交う朱雀大路の左右には街並みが広がっていました。


高官(こうかん)たちの(やかた)
大宰府の街並みのメインストリートであった朱雀大路沿いには、大宰府で働く身分の高い役人(高官(こうかん))の(やかた)があったようです。
ジオラマで再現された時代から約100年後、901年に大宰府へと流された菅原道真(すがわらのみちざね)は高官用の館に滞在しましたが、手入れも悪く大変荒れ果てた様子だったようです。
この館は「
()南館(なんかん)」と呼ばれ、後に榎社(えのきしゃ)が建立されました。
また、周辺からは高官だけが
着用(ちゃくよう)を許された白玉帯(はくぎょくたい)(かざ)りなども出土(しゅつど)しています。


ジオラマでは便宜上(べんぎじょう)、大宰府において長官(ちょうかん)である(そち)に次いで高官であった「大弐(だいに)」「少弐(しょうに)」の館として再現しています。


客館(きゃくかん)
客館(きゃくかん)とは、外国からの使節(しせつ)たちが滞在(たいざい)するための施設(しせつ)です。
古代における大宰府は、外国とのやりとりを行う窓口として重要な役割を(にな)っていたため、政庁(せいちょう)で外交儀礼(ぎれい)などが行われました。
海を渡ってやってきた外国の使節たちは、博多湾(はかたわん)沿いの筑紫館(つくしのむろつみ)鴻臚館(こうろかん))にまず向かい、その後、(かん)(どう)を進み、(みず)()の西門を通り、大宰府の街並みへ南側から入り、客館に滞在しました。
客館跡では青銅(せいどう)で出来たお(わん)や皿、スプーン、貴重な陶磁器(とうじき)などが見つかっており、豪華(ごうか)なおもてなしが行われていたようです。

客館では大宰府の役人(左列)と外国の使節団(右列)が対面しているようです。


ジオラマで巡る古代大宰府の旅はいかがだったでしょうか?このコーナーでは、今後も少しずつご紹介する場所を増やしていく予定です。
 ご紹介した以外にも、太宰府には古代にゆかりある様々な遺跡が残っています。ぜひ散策しながら、古代の大宰府に想いを馳せてみてはいかがでしょう。